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대담한 사기꾼 폴 조던 스미스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폴은 목사였고, 종교와 과학을 강의하는 강사로서도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문학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왜 대담한 사기꾼이 된 걸까요?
대담한 사기꾼의 배경을 알아봅시다.
보통의 위작 미술이라 함은 보통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첫째, 기존의 작품을 그대로 복제한다.
둘째, 기존 작가의 화풍으로 새롭게 그려낸 작품을 그 작가의 작품이라고 속인다.
이유야 많겠지만 대강 추려보자면 이렇습니다.
1. 자신은 대단한 실력가인데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속상해서 속였다.
2. 실력도 과시하고 명성도 얻으려고 속였다.
3. 쉽게 돈을 많이 벌기위해서 속였다.
물론 이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 경우는 잘 없고 대체적으로는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중국 어딘가에서는 모작을 그렇게 완벽하게 그려준다고 합니다.
모작들의 가격은 말할 것도 없이 저렴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모작인 것을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똑같이 그려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작하지 않은 것을 남의 이름으로 속여서 파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폴 조던 스미스가 활동한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담한 사기꾼의 행보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폴은 1885년 태어나 1971년까지 살았습니다.
1908년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목사로써 봉사했으며 강의도 했습니다.
강사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1910년에 시카고에서 목사로 취직하여 정착촌도 운영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대학원 과정에서 시간제 강사로도 일했으며 이를 계기로 인맥을 쌓게 됩니다.
이때 그가 교류한 인물들은 변호사, 사회활동가, 소설가, 편집자, 작가 등등 폭넓은 대인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당시 미국의 현대미술은 비판하기 위하여 위작을 시도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의 아내였던 사람 중 하나인 사라 빅스비 스미스가 있습니다.
사라는 취미로 종종 그림을 그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1913년에 미국 최고 규모의 공모전이었던 아모리 쇼에 작품을 출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모리 쇼란 미국 미술 협회에서 주관했던 국제 현대 미술 전시회였습니다.
미국 외 유명 작가들의 초대전과 미국 내 작가들의 공모전으로 이루어진 쇼였습니다.
드가, 모네, 르누아르, 마티스, 반 고흐, 뒤샹, 고갱, 피카소까지 당시부터 현재에도 유명한 작가들까지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쇼였습니다.
사라의 그림은 어떠한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모전에서 탈락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폴과 결혼을 하게 되고, 어느 날 그날의 탈락 소식을 이야기해 줍니다.
운이 좋았더라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과 함께 전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고 말입니다.
폴 스미스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었는지 그 이야기에 분노합니다.
'당신의 작품이 공모전에서 탈락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현대미술이라고?
그들이 하는 것은 현대미술이 아니다.
내가 진짜 현대미술이 뭔지 보여주겠다.'
폴 조던 스미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학벌도 좋았고, 학위도 많았고, 이미 쓴 책도 많았습니다.
습득이 빨랐던 것인지, 발상이 좋았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현대미술을 굉장히 쉽게 생각했습니다.
먼저 당시 유명하던 현대미술에서 가장 유명했던 고갱과 팝 하트를 모델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림은 아이들의 그림체로 유치하게 그리는 것이 좋다.
2. 주제는 원시적으로 한다.
3. 현대미술은 참 쉽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이야기는 폴이 실제 진행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그림을 그려서 발표하게 됩니다.
바로 게시된 저 그림을 1925년 뉴욕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 "We have no bananas"을 출품했습니다.
유럽풍의 이름을 추구해야 그림이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파벨 제르다노비치'라는 가명을 통하여 세상에 작품을 공개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는 살바도르 달리였고 그의 이름이 유럽식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럽이 예술의 원조 같은 느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새롭게 자라나고 있던 역사도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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