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셸 바스키아, 그의 예술과 유명세는 어떤 것일까요?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그의 그림은 유명세 때문인지 매우 거액에 거래되었습니다.
현재 그 작품의 가치는 한화로 1,000억대를 우습게 넘습니다.
장미셸 바스키아, 그는 누구인가
장미셸 바스키아, 그는 누구일까요?
나는 바스키아의 작품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옷에 프린팅 되어 판매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찾아보니 심지어 지금도 판매 중입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것이 대충 그린 듯한 왕관 모양입니다.
'바스키아'는 누구일까요?
왜 거의 35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그림이 인쇄된 옷이 팔리는 걸까요?
바스키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1960년생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4살 때 이미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예술적 감각도 타고났었다고 합니다.
2개 국어를 할 줄 알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에 다방면으로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어머니가 데려갔던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접한 바스키아는 화가가 되기로 합니다.
시간이 흘러 8살 때,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이때, 비장을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회복이 될 동안 어머니가 사다 준 책을 읽었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레이 해부학'입니다.
이 책이 나중에 그의 예술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 해에 부모가 이혼하며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됩니다.
11살이 되던 해, 바스키아는 이미 4개 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13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이후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남은 생을 보내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면서 평소에도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사이가 더욱 나빠져 집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현재도 유명한 그의 예술
처음 그가 유명해졌던 것은 친구와 함께 유명한 낙서 그룹을 만들게 됩니다.
이름은 'SAMO'로 'Same Old Shit'의 약자입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흔해 빠진 낡은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바스키아는 그룹의 친구들과 함께 뉴욕에 있는 거리를 캔버스 삼아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 그려진 낙서들은 신문에도 났습니다. 단시간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바스키아는 이 낙서들을 이용해 유명세를 타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작업에 지장이 생기니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SAMO는 해체됩니다.
이후 바스키아는 학교를 그만둔 채 거리에서 노숙을 합니다.
이때의 바스키아는 친구와 함께 살며 도시의 영화 제작자와 예술가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았습니다.
다양한 재료의 사용과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즉흥적으로 표현하였고,
만화의 요소를 집어넣고, 문자를 쓰고 지우는 등의 방식을 구사했습니다.
그의 작품의 주제를 이야기하자면, 자전적 이야기와 흑인 영웅, 만화, 낙서, 해골 그림,
통합과 분리, 죽음, 부와 가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늘 강렬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자신의 일생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은 작업 중에 예술을 생각하지 않고, 삶에 관하여 생각할 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대중은 그의 작품에 뜨겁게 반응하였고 그는 강박적으로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거리의 예술가로 시작하여 화가로서 사는 8년간 3,0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에게 유명세는 독이었을까
유명인의 삶을 동경하던 바스키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많은 친구의 도움과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그중 최고의 지원자는 앤디 워홀이었습니다.
1982년, 앤디 워홀과 그의 친구가 식사하러 레스토랑에 갔을 때, 그는 워홀을 찾아가 자신의 엽서를 강매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앤디 워홀은 그의 후원자가 되고 앤디의 친구는 바스키아의 그림을 수집하는 역할을 해주어 몸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합니다.
그는 당시 이미 아주 유명한 화가였고, 본인이 재력과 인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품, 그 이상으로 바스키아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스키아의 개인 전시회는 아주 성공적이었고, 그는 곧바로 그리도 동경하던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바스키아에게 앤디는 가족이자 예술적 동료였습니다.
앤디 워홀은 바스키아를 통하여 그림의 힘을 재발견하였고, 둘은 시험적인 다양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150점이 넘는 공동 작품을 제작하며 서로의 예술 세계에 깊은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바스키아의 유명세는 그를 더는 행복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혁신적이고 순수하다고 좋아하던 대중들이 돌아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환호하던 대중들이 유치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난하는 순간에 그는 점점 더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는 워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거나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라는 등의
수많은 소문과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급속도로 얻은 인기는 그에게 성공과 함께 불안을 가져다준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더욱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의 불안은 적중하여 대중의 관심은 그를 뒤돌아섰습니다.
게다가 앤디 워홀과 함께한 전시회는 성공적이지 못 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괴로워하던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에게서 떠나 홀로서기를 시도합니다.
워홀은 이 일을 두고 자신의 인기를 감당하지 못해서 바스키아가 떠났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후 둘이 연락을 했다고 하는 곳도 있고, 아니라는 곳도 있어서 확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 중 사망한 워홀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당시 바스키아는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 아프리카에서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아프리카로의 이주를 이틀 남겨놓은 날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앤디 워홀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상실감에 약에 취해 살아갑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결국 바스키아는 약을 과다 복용하여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27세의 일입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방황하고 고통스러워 모습이 더욱더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는 그의 초창기 그림도 정신적으로 평온해 보이지 않는데,
후기의 그림을 본다면 정말 위험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가지고 오지는 못했습니다만, 검색하시면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짧은 기간 활동하였지만, 늘 주목받는 화가였습니다.
본인이 원한대로 유명한 삶을 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행복했을까요?
흑인, 화가, 앤디워홀, 요절.
이 것들이 장미셸 바스키아를 정의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흑인 차별에 대하여 벗어나고 싶어서 애를 썼는데, 제2의 피카소가 아닌 검은 피카소가 되었다는 사실이
저는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자신은 검은 예술가가 아니라 그냥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는 바스키아.
그가 지금 자신의 작품들이 이렇게나 비싼 값에 팔린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말을 할까요?
쟝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거의 극과 극입니다.
저는 최근 생각이 바뀐 쪽입니다. 4살 아이의 그림 같다, 유치하다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4살 아이의 그림을 보고 그의 그림을 보니 다른 무언가가 보입니다.
흥미를 가지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체가 즐겁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추상적인 그림에서 직감적인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답이 명확히 정해져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추론해 보는 것과 나의 취향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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