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과 개념 미술 그리고 수집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현대 미술이라 하면 난해하고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의 분야입니다.
개념 미술이란 그러한 현대미술의 한 장르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술품들을 구매하는 소위 '아트컬렉터'라고 불리는 수집가의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난해한 현대미술과 수집가
세계적인 아트 페어인 '아트바제'의 2020년 설문조사 내용입니다.
고액순자산(High net worth) 컬렉터, 풀이하자면 순수 금융자산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가진 수집가들에게 '왜 예술작품을 수집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복수 응답 가능)
미학적 이유 또는 장식하려고 구매한다. 95%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구매한다. 93%
투자수익을 위하여 구매한다. 85%
수집품의 다양화를 위하여 구매한다. 85%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돈 좀 있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높은 교양수준을 뽐내기 위해서, 혹은 그 '문화적 자본'을 '경제적 자본'으로 환산하기 위하여 난해한 현대미술을 사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나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티스트와 문화를 지원하고 싶어서 구매한다. 92%
사회적인 이유로 구매한다. 86%
실제로 이들은 '경제적 자본'으로 돌려받기 어려워 보이는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난해한 작품을 구매하였습니다.
또한 경력이 없는 신입 작가들의 작품만 골라서 구매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처음 출시될 때는 외면 받았던 현대미술가들이 나중에라도 영화나 팝 음악, 디자인과 같은 대중문화에 영감을 주는 '예술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답변을 했던 수집가 덕분입니다.
또한 쌓여가는 적자를 알면서도 자신이 모은 예술품들을 미술관의 형태로 공개하여 대중에게 새로운 실험에 눈을 뜨게 하는 수집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완벽히 순수한 마음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만, 너무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난해한' 개념 미술
개념 미술 작품을 접하면 처음 드는 생각은 '난해하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쉽게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모 미술관에는 전설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 작품인 조셉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1969)의 스툴 버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작품 해설을 처음 보았을 때,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스툴', 동시에 '의자'라는 것은 구체적인 실제의 사물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2. '의자'는 사람이 걸터앉을 때 사용하는 기구이다.
3. 이런 기구들을 '의자'라고 부르기로 것은 사회적인 약속인 언어다.
셋은 전부 의자의 개념을 가지므로 하나가 된다. 작품의 제목이 하나이면서 셋인 이유이다.
이 개념적인 하나는 의자이면서 또 의자가 아니다. 이 의자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이 생겼지만, 작품이기에 앉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의자의 본질적인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면 현재도 '의자'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코수스는 작품을 통하여 사물을 규정하는 '개념'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실 여기에서 진정한 의미의 '작품'은 의자도 아니고, 의자 사진도 아니고, 글도 아닙니다. 작가의 의도를 포함한 아이디어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이 생각은 동시에 다른 장소에서도 다른 의자와 의자 사진, 글로 전시될 수 있습니다.
(전시가 꾸준히 성공적으로 가능하다면 정말 떼돈 버는 기계가 될 것 같습니다.)
현대 미술에서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알려주고, 또 어떤 방식이 정확한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을 중요한 예술적 가치 중 하나로 봅니다.
이런 개념미술 운동은 1960년에 처음 일어나게 됩니다.
'개념미술의 전파자'라 불리던 예술품을 판매하던 큐레이터, 세스 시글럽은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미술이 그저 투자하기 좋은 물건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개념미술은 부자의 소유물이 되기보다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보일 것이다.
-세스 시글럽
그런데, 그의 주장과는 달리 팔리지 않을 줄 알았던 작품이 팔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너무 잘 팔려서 투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의 주장은 그저 판매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는 급격히 성장한 신흥 부자들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들은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높은 문화적 자본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신흥 부자집단은 자신이 가진 돈을 투자해서 자신을 차별화하고 상위계급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진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거기에 공감하였는지를 지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이 예술이 그들에게 새롭고 지적인 부유층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금전적인 수익을 가져다줄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투기적으로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개념미술 작품의 가격은 폭등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은 원했던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수집가와 개념미술 작가
미술사학자 알렉산더 알베로는 결과적으로 개념미술의 상품화에 시글럽 조차도 이바지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개념미술의 수집가들은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와 같이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인 경우에도 '투자수익'을 거두기 위하여 '진품'을 소유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지 궁금합니다.
개념미술 작품을 판매하던 시글럽은 작품의 소유권 증명서를 양도, 작가의 서명을 받는 방법을 이용하여 투자자들의 요구에 응했습니다. 상당수의 작가도 이를 달갑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작가들의 태도에 대하여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이치입니다.
개념미술의 시작은 예술의 폭을 넓히고 예술이 부자들의 장식품으로만 소비되는 것에 반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20세기,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이러한 돈과 예술의 씨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투기 현상이 결과적으로 예술가들이 예술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과연 팔리지도 않고 전시만 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전적인 성과란 엄청난 동기가 됩니다. 투기 자체는 좋지 못한 현상이 분명합니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이 또한 예술가들이 예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장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댓글